《유령의 꿈속에서 (개정판)》 완독

독서 메모
18p.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될 즈음에는 널 한입에 꿀꺽 삼켜버리는 상상도 했어. 가지고 싶은 마음과 가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할 땐 그걸 먹어버리면 된다고 배웠거든. 아무 말 없이 보냈던 우리의 긴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한입 베어 물면 또다시 더운 여름이 올 것만 같아. 20p. 사랑이 짓뭉개지지 않게 조심해 25p. 사랑은 상처를 먹는댔어 둘은 하나가 될 거야 상처는 사랑이 되어 배 속을 가득 채울 거야 목구멍에 걸린 사랑을 뱉어 내본 적이 있니? 그건 아마 사랑으로 위장한 여름의 가시였을 거야 목구멍에 흉터가 지기 전에 뱉어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가시는 목구멍에 집을 짓고 계절이 바뀌는 순간 다시 짓무르게 될 거야 31p. 금방 고꾸라질 도미노 같았지만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던 우리의 시월을 기억해 영원하다는 건 뭐야 평생이면 영원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살아있는 한 내 평생은 영원일까 그게 다 뭐야 평생은 찰나고 영원은 끝나지 않는 건데 영원에게는 이름값이 있잖아 그럼 네 평생을 내 영원이라고 하자 영원을 읊던 가을밤 유일하게 따뜻했던 네 손을 잡고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을 배웠어 33p. 유진아, 여름은 왜 자꾸만 미화되는 걸까 나는 찜통같이 더운 숨 막히는 날씨도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푸른 하늘이 장마의 우울한 폭우로 쉽게 변해버리는 것도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흘러서 찝찝해지는 것도 나에겐 그저 불쾌한 기억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여름을 동경하고 사랑하고 돌아갈 곳으로 삼는다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돼 그러게 왜 유독 여름에 집착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바다의 최면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종 기억을 개조당했을지도 몰라 반짝이는 바다에 들어가게 만들기 위해서는 여름이 제격이니까 40p. 태우면 바람을 타고 당신이 있는 곳에 닿을까 싶어 태워 날리고 바다에 뿌리고 땅에 묻어도 봤어요 근데 태우면 못 읽잖아요 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모르는 거잖아요 당신한테 재만 도착하면 어떡해요 바스러져 형태를 잃은 제 편지는 천사가 일일이 붙여주나요 전지전능한 신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주나요 저는 모르겠어요 52p. 청춘도 낭만도 사랑도 그만둘래요 청춘은 허상이고 낭만과 사랑은 과자의 부스러기 같아요 60p.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는 건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주었잖아 62p. 그러니 우리는 끝없이 헤엄쳐야만 해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만들고 파도를 일으켜 68p. 우주의 사랑은 영원할 순 없지만 무한하다 우주에서의 사랑은 무한하게 두고 우리는 찰나의 사랑을 하자 우리가 닳아 사라지게 된다면 전부 우주에 맡기는 거야 우리는 찰나의 사랑을 했지만 북극성 저 너머에서는 무한일 테니 우리는 찰나를 살아가자 찰나를 사랑하자 70p. 끈적한 사랑을 먹고 자란 이끼는 왼쪽으로 자란다 초록의 이끼를 손으로 꽉 쥐어짜면 흘러내리는 붉은 사랑 초록색 사랑도 사랑이고 붉은색 사랑도 사랑이니 이끼를 사랑의 징표로 하자 86p.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허공을 바라보다 문득 저 안에 해파리가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불규칙한 형상 안에서 나는 해파리를 찾았고 너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지. 마지막까지 남는 건 해파리일까 너일까 한참을 고민하다 연기 속에서 널 끄집어냈어. 바다에서도 사랑은 사랑이고 우주에서도 사랑은 사랑이니 언제까지고 우린 사랑일 거야. 해파리 같은 사랑을 하며 유영하는 건 언제나 우리였잖아. 그러니까 우린 사랑을 했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을 바닷속을 유영하는 너와 표류하는 내가 만나 해파리 같은 사랑을 했지 아무리 흐물거리고 늘어져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꼭 기억해 92p. 사랑이었나 고민하지 말고 깔끔하게 잊어요. 저는 없었던 사람이에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면 허공에 헛손질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어요. 기왕이면 아예 넘어지지 않는 게 좋겠네요. 98p. 새하얀 눈 위를 함께 거닐던 겨울밤을 기억해? 넌 뽀얀 도화지 위에 신나게 발자국을 찍으면서 회색이 된 질척거리는 눈은 싫다고 했었지. 난 그 모든 과정을 눈의 생이라고 생각했어. 눈의 생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야. 새하얀 눈을 밟으려 새벽에 밖에 나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발자국을 남기고는 적막 사이에 우뚝 서서 뽀득거리는 소리를 즐기곤 했지. 난 어린애가 아닌데도 그게 그렇게 신났어. 먼지와 매연에 회색이 되어버린 눈도, 녹아 얼음판이 되어버린 눈도 결국 내가 가장 먼저 밟은 거니까. 순백의 눈을 가장 먼저 더럽힌 건 나라는 오만하고도 순수하지 않은 행위지. 108p. 전부 털고 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우물 같은 우울 속에 다시 빠지는 일은 없게 숫자와 활자에 전부 불어넣고 저는 떠납니다. 그리워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은 많이 닮았더라고요. 그리워하고 원망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마음이라는 건 들쭉날쭉해서 길이를 재기가 어려워요. 상대방의, 자신의 마음 크기를 의심하고 줄자를 들이밀기보다는 마음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올바른 곳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요. 109p. 아프지 않고 행복한 순간들을 간직하면서 지내시길. 청춘이라는 파도에 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질 수 있길 바라요. 여전히 흔들리고 불신에 가득 찬 아픈 시기지만 뒤돌아보면 이런 게 청춘 이라는 걸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요. 청춘이고 낭만이고 뒤돌아봤을 때 아름답지 않더라도 충분히 빛나는 것들이니 오늘을 같이 살아내요. 110p. 전 아직도 악몽을 꿉니다. 아직도 꿈속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요. 울면서 깨어나는 날들과 가까워지다 미끄러지는 하루를 보내곤 해요. 그렇지만 오늘도 잠에 들고 내일을 살아냅니다. 때로는 관성에 몸을 맡기는 게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우리는 작열하는 태양에 지지 않고 여름으로부터 살아남기로 해요. 관성에 몸을 맡기고 돌아오는 봄을 향해 팔을 벌려요. 내일을 함께 살아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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