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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소설 도입부 모음

·9. 20.·조회 775·댓글 11·좋아요 20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 소설 도입부 모음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을 듬뿍 담아 선정했고 너무 유명해서 이미 모두가 알 법한 문장(이방인, 설국, 인간 실격, 안나 카레니나 등)은 제외했습니다.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사데크 헤다야트,『눈먼 올빼미』(1937) 가공할 신경증상, 형언할 수 없는 짜증. 이 정도까지 사랑하는 것은 병이다(그리고 나는 앓는 게 좋다). —조르주 바타유,『불가능』(1947) 그 시절의 삶은, 마치 끝도 없는 축제 같았다. 집을 나서 길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곧잘 제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죽도록 피곤에 절어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했다. 불이라도 나 주기를, 집 안 어딘가에서 아기가 태어나 주기를, 아니면 느닷없이 새벽이 찾아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기를. 그리고 우리가 들판을 지나 언덕 저편까지 걷고 또 걷는 날이 오기를. —체사레 파베세,『아름다운 여름』(1949)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프랑수아즈 사강,『슬픔이여 안녕』(1954) ————— 나는 찾는다, 나는 찾는다. 나는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내가 겪은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그게 누구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전달하기를 원하지, 내 경험을 그대로 혼자 간직하며 끝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겪은 일, 그것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 심오한 혼돈이 나는 두렵다. 내게 일어난 일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할 줄 몰랐던 탓에 뭔가 다른 종류의 사건으로 경험해버린 그런 일이 내게 정말로 일어났던 것인가? 그 일을 나는 혼돈이라고 부르게 되며, 그 일 이후에 비로소 앞으로 계속 나갈 확신을 얻은 것은 내가 귀환해야 할 방향을 알게 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향은 이전의 질서이다. 내가 그 일을 혼돈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 경험 안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자신을 입증하게 되면 나는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세계를 상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를 얻을 능력은 갖추지 못했고, 이 사실을 나는 잘 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G.H.에 따른 수난』(1964) 좋아했던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열 때 당신이 준 철필을 사용했다. 지금 그 철필로 천천히 내 정맥을 연다. 원피스 소매를 걷지는 않았다. 칼날은 먼저 옷감 속으로 다음에는 피부 속으로, 마지막으로 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장 먼 곳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었다. 저항이 점차 줄더니 이내 사라졌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마치 첫 태양에 살짝 베인 꽃이 벌어지듯이. —크리스티앙 보뱅,『마지막 욕망』(1980)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어떤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흔적 없고 매끄러우며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애호가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염세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고함치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불행해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으며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호들갑스럽게 웃지도 않는…… 그는 살 뿐이며 되도록이면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려고 할 뿐이다. —최윤, 「푸른 기차」(1994)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백 살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다. 어쩌면 이제 겨우 아흔 살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마 백 살이 맞을 것이다. —모니카 마론,『슬픈 짐승』(1996) 다쳤어. 무언가 탄식한다, 말없이. 의식을 잃는 순간, 고집스레 퍼지는 침묵을 향해 말들이 돌진한다. 최초의 전설적인 물결 속에서 의식이 그렇게 가라앉다 떠오르다를 반복한다. 기억은 섬과 같다. 기억이 지금 어디로 자기를 데리고 가든 거기까지 말들이 미치지는 못할 거야, 마지막 맑은 정신으로 한 생각 중 하나는 그랬을 것이다. 무언가 탄식한다. 그녀 속에서, 그녀를 둘러싸고서. 이 탄식을 들어줄 이 아무도 없다. 물 위에 떠도는 정신과 물결이나 들어줄까. 기묘한 상상이다. —크리스타 볼프,『몸앓이』(2002)

댓글 11

  • ·9. 20.

    와우.. 진짜 충격적인 도입부가 이렇게나 많군요.. 진짜 책을 많이 읽으시나봐요! 개인적으론 슬픈 짐승의 도입부가 강렬하네요 ㅎㅎ

    • *·9. 20.

      사실 마지막 욕망은 전에 서점에서 보고 문장이 강렬하고 아름다워서 반하긴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슬픈 짐승은 명작이니까 꼭 읽어보세요..

    • ·9. 21.

      슬픈 짐승. 바로 찜해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

    • *·9. 21.

      저야말로 감사하죠. 취향을 나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 ·9. 20.

    와우..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계세요?? 독서노트 완전 꼼꼼히 쓰시나봐요 ㅎㅎ

    • *·9. 20.

      따로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언젠간 정리해 보고 싶었어서 하나하나 다시 찾아서 작성했습니다.

  • ·9. 21.

    오.. 저는 위에 언급하신 이방인, 인간실격, 안나카레니나 정도만 첫문장 외우고 있었는데 ㅋㅋ 저도 앞으로는 저만의 사랑하는 소설도입부를 기억하고 노트해봐야겠어요 ㅋㅋ

    • *·9. 21.

      실은 저도 저기 올린 것들을 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기억 속에서만 흐릿하게 존재하던 것들을 이렇게 모아두니까 다시 보기도 편하고 좋네요. 어떤 문장을 좋아하시는지 궁금한데 나중에 올려보실 생각 있나요?

    • ·9. 21.

      네 ㅋㅋ 저도 조만간 정리해서 한 번 올려볼게요!

  • ·9. 24.

    눈먼 올빼미 도입부 넘 좋네요...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 *·9. 24.

      읽으면 자살 충동이 든다는 이유로 이란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던 특이한 책이죠. 전 굉장히 취향이었는데 그래도 특유의 염세적인 감성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듯합니다. 초현실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추천드립니다.